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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 파괴와 공존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인간성

by rilry 2025. 11. 23.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전 세 번째 리뷰에서는 1997년 개봉작 <모노노케 히메>를 다룬다. 문명과 자연의 충돌을 거대한 서사로 펼쳐낸 이 작품은 감독의 세계관을 응축한 결정판으로 평가된다. 1편이 ‘미야자키적 상상력의 근원’을 살폈고, 2편이 ‘정체성과 세계의 관계’를 다뤘다면, 이번 글에서는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가 어떤 윤리적 질문을 발생시키는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모노노케 히메, 파괴와 공존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인간성

※ 이 이미지는 AI로 생성된 오리지널 일러스트이며, 스튜디오 지브리 또는 영화 「모노노케 히메(Princess Mononoke)」의 공식 이미지가 아닙니다.
※ This image is an original AI-generated illustration and is not an official image of Studio Ghibli or the film “Princess Mononoke.”

거대한 숲의 신들과 인간, 충돌의 기원

<모노노케 히메>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이 절대적인 균형을 잃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철을 얻기 위해 숲을 파괴하는 에보시 일행의 등장은 문명화의 명분 뒤에 감춰진 폭력을 여실히 보여주며, 인간이 ‘생존’과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온 모든 행위를 다시 묻게 만든다. 미야자키는 인간의 욕망을 단순히 탐욕으로 축소하지 않고,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 구조 자체가 자연과 충돌하도록 설계된 것임을 보여준다.

숲의 신들은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경계선이자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심축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발전할수록 이 경계는 점차 밀려나고, 숲의 신들은 더 이상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내몰리는 피난민’처럼 묘사된다. 이 모습은 현대 문명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과 너무나도 닮아 있으며, 감독은 이를 통해 문명화가 가져온 상실과 파괴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특히 멧돼지 신 나고가 총탄을 맞고 ‘저주받은 신’으로 변하는 순간은 자연이 인간의 폭력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부패하듯 번져가는 검은 벌레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자연의 분노, 균형 붕괴의 결과이며, 인간이 건드린 세계의 균열이 어떤 방식으로 되돌아오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미야자키는 문명·자연·폭력의 관계를 선악의 구조가 아니라, 서로의 조건이 충돌하며 불가피하게 발생한 ‘비극의 구조’로 제시한다.

결국 이 충돌은 작품 전체의 원동력으로 작동하며, 관객은 자연을 파괴한 인간의 책임뿐 아니라 왜 이런 충돌이 생겨났는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가 정말 정당한지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된다.

산과 아시타카, ‘저주’가 드러내는 또 다른 세계

작품의 중심에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으나 결국 같은 질문을 마주하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숲의 신들에게 길러진 인간 소녀 산과, 저주를 받은 채 진실을 찾아 떠나는 왕자 아시타카다. 산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가장 격렬하게 거부하는 존재로, 인간 사회가 자연에 가한 폭력의 결과를 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그녀의 분노는 단순한 적개심이라기보다, 숲의 생명 전체의 목소리에 가깝다.

반면 아시타카는 저주를 통해 ‘세계의 이면’을 보게 된 인물이다. 저주는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인식’을 여는 통로이기도 하다. 미야자키는 아시타카의 여정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의 폭력성을 드러내면서도, 그 속에서 변화와 복원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제시한다.

아시타카가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양쪽의 고통을 모두 바라보려는 태도는 미야자키 세계관의 핵심이다. 이는 단순한 중립이 아니라, 파괴와 생존 사이에서 길을 찾기 위해 필요한 태도이자, 문명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독의 윤리적 제안이기도 하다.

산과 아시타카의 관계는 충돌 속에서 피어나는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둘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지니지만, 상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작은 화해의 시작이다. 특히 산이 아시타카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진심을 인정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공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파괴 이후의 세계, 공존을 향한 미야자키의 질문

<모노노케 히메>의 결말은 절대 낙관적이지 않다. 숲의 신이 죽고, 숲은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상처를 입으며, 인간 또한 많은 것을 잃는다. 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지속적으로 충돌한 결과가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보여주는 냉혹한 진단이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이 파괴를 절망의 끝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으로 재배치한다. 숲의 영혼이 다시 피어오르는 장면은 회복의 희망이라기보다, 세계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비판적 메시지에 더 가깝다. 회복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해야만 가능한 과정임을 작품은 명확히 말한다.

미야자키는 공존을 감상적 이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공존은 저절로 주어지는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고민하고 다시 선택해야 하는 ‘윤리적 실천’에 가깝다. 숲과 인간은 완전히 화해하지 못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세워나갈 가능성만은 남긴다.

결론적으로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영화 중에서도 가장 정치적이고 철학적이며, 인간의 존재 방식을 본질적으로 되묻는 작품이다. 이번 리뷰는 3편에 해당하며, 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작품을 통해 미야자키 세계관의 확장과 변주를 이어서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