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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창작자의 죄책감과 아름다움의 딜레마

by rilry 2025. 11. 26.

<바람이 분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항공 공학자 ‘호리코시 지로’를 주인공으로 삼아, 가볍고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고자 했던 순수한 창작자의 꿈과 그 꿈이 전쟁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어떤 윤리적 갈등과 죄책감을 낳는지 면밀하게 그려냅니다. 작품은 낭만적인 비행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파괴성을 동시에 조명하며, 창작자의 꿈의 본질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본 글에서는 작품의 서사 구조, 실제 역사와의 교차 지점, 그리고 미야자키가 창작자로서 남긴 고백과 윤리적 메시지를 중심으로 영화가 가진 다층적인 의미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자 합니다. 특히, 아름다움과 폭력 사이에서 번민하는 예술가의 내면을 따라가며, <바람이 분다>가 왜 그의 은퇴작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탐구할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 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 - 바람이 분다 포스터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 신화에서 현실로

<바람이 분다>는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의 생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의 실제 업적을 단순한 영웅적 신화로 포장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지로는 오직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효율적인 비행기"라는 기술적 이상과 아름다움에 매료된 순수한 기술자였지만, 그가 구현한 이상은 당시 일본이 광적으로 나아가던 군국주의의 팽창이라는 시대적 흐름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바로 이 단절될 수 없는 창조와 파괴의 연결고리를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으며, ‘한 인간의 꿈’과 ‘국가의 파괴적 목적’이 어떻게 충돌하고 얽히며 창작자에게 윤리적 딜레마를 안겨주는지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특히 영화 초반, 지로가 이탈리아의 항공 설계자 카프로니를 꿈속에서 만나 비행을 동경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순수한 창작 욕망의 본질을 전달합니다. 비행기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해방감과 기술의 황홀경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순수한 동경은 제정 러시아 혁명 이후의 경제적 빈곤, 사회적 억압, 그리고 팽배한 군국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점차 다른 의미로 전환됩니다.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거대한 자원과 실험 공간, 그리고 제작 비용은 오직 국가의 군수 산업만이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즉, 지로의 천재적인 재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목적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여기서 창작자 개인의 숭고한 의지가 거대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얼마나 쉽게 무기 개발이라는 폭력적인 형태로 왜곡되는지를 우회적으로,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냅니다. 지로의 모든 기술적 고민과 열정은 오로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도구를 만드는 데 집중되며, 지로는 그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내면의 순수함을 지키려 애씁니다. 영화는 이 외면 행위 자체가 창작자가 짊어져야 할 첫 번째 윤리적 딜레마임을 조용히 질문합니다.

더 나아가, 영화는 1923년 간토 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의 파괴적인 힘을 보여주며, 인간이 만든 기술이 자연의 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강조합니다. 이는 파괴의 속성이 비단 전쟁뿐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조건임을 암시합니다. 지로의 꿈은 아름다운 기술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 기술은 결국 인류가 서로를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용될지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딜레마는 지로의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며, 동시에 미야자키 감독이 창작자로서 평생 고민해 온 자기 성찰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한 창작자와 ‘제로센’의 그림자

<바람이 분다>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윤리적 지점은 지로가 개발한 ‘제로센(Zero-sen)’ 전투기입니다. 이 기체는 실제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주력기로 사용되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며, 전쟁 범죄의 중심에 놓여 있던 파괴의 상징이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 불편한 역사적 사실을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미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통해 더욱 복잡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기술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선한가?”, “창작의 결과가 폭력과 죽음으로 이어질 때, 창작자는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딜레마는 영화 전반에 걸쳐 끈질기게 관객의 의식을 파고듭니다.

영화 속의 지로는 제로센의 ‘무기적 의미’를 의도적으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투기를 만들었다는 의식보다, 오로지 “가볍고, 빠르고, 아름다운 비행기”라는 기술적 이상에 자신의 모든 지적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지로는 기술적 난제를 해결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우아한 움직임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지로의 ‘기술적 순수성’과 ‘윤리적 결과’의 분리를 절대 수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로의 비행기가 순수하게 하늘을 가르는 순간은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 비극과 죽음을 가져오는 순간일 수 있음을 암시하며, 영화는 이 양면적인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지로를 전쟁 영웅이 아니라 ‘딜레마 속의 인간’으로 위치시키며,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지로가 개발한 비행기들은 종종 폐허가 된 도시나 비참한 가난이라는 배경 속에서 날아다니는데, 이는 그의 기술적 아름다움이 시대의 폭력성과 불가피하게 엮여 있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미야자키 감독 본인 역시 “전쟁을 위한 기술을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해 왔음을 여러 인터뷰에서 고백했습니다. <바람이 분다>는 따라서 단지 호리코시 지로라는 한 엔지니어의 전기 영화가 아니라, 감독 자신이 평생 지고 온 ‘기술 문명과 전쟁에 대한 예술가적 죄책감’에 대한 고백에 가깝습니다. 그는 지로의 입을 빌려 창작의 기쁨과 파괴의 그림자 사이에서 겪는 딜레마의 고통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낳는 윤리적 모순을 관객에게 숙제로 던집니다. 이는 미야자키가 평생 비판해 온 전쟁의 잔인함을, 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화로 그려냄으로써 그 스스로도 이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하는 용기 있는 성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야자키의 마지막 질문, 꿈은 누구의 것인가

영화의 후반부에서 지로는 창작자로서의 꿈과 개인적 행복이라는 두 가지 가치가 모두 시대적 폭력에 의해 흔들리는 상황에 놓입니다. 특히 아내 나호코와의 관계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광기 속에서 끝내 지켜낼 수 없는 개인적 행복의 상징처럼 그려집니다. 나호코의 폐결핵 악화는 단순히 병을 앓는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아름답고 섬세한 것들이 전쟁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의해 얼마나 쉽게 짓밟히고 소멸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은유입니다. 지로가 나호코의 병실을 떠나 비행기 설계에 몰두하는 행위는 개인의 행복과 책임을 창작자로서의 꿈을 위해 희생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으로 해석됩니다. 미야자키는 지로의 집요한 창작 행위를 개인의 슬픔과 상실 위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자의 잔인한 운명으로 조명합니다.

영화의 상징적인 주제인 ‘바람’은 창작에 대한 영감과 추진력인 동시에, 역사적 운명과 파괴의 힘을 의미합니다. 지로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라는 구절을 읊조리는 것은 창작의 본질이 결국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폭력적인 시대 속에서도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의지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지로가 꿈속에서 카프로니와 다시 만나는 장면은 미야자키 세계관 특유의 환상성과 철학적 질문을 가장 깊이 응축하는 순간입니다. 지로는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환영처럼 하늘을 채웠다가 결국 불타버리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기술이 누구를 위해 존재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무엇이 파괴되었는지를 묻는 듯한 복잡한 죄책감이 담긴 표정을 짓습니다. 카프로니는 “창작자는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단순히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위로라기보다 ‘창작 행위가 낳은 결과를 끝까지 직시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창작자 윤리에 대한 더 깊은 요구에 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람이 분다>는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단순한 교훈적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꿈이라는 숭고한 욕망이 현실의 폭력과 불가피하게 충돌할 때, 창작자는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할 것이며, 그 선택의 결과는 누구에게, 그리고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끝까지 고민해야 한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윤리적 선언에 가깝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기술적 아름다움이 어떻게 전쟁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창작자로서 어떤 태도로 시대를 마주하고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하는지를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로 우리 모두에게 남기는 고백록인 것입니다.

<바람이 분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창작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집약한 작품이자, 예술과 기술의 윤리적 딜레마를 가장 아름답고 슬프게 그려낸 명작입니다. 이 글을 통해 창작자의 꿈과 죄책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지로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