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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잃어버림과 회복의 여정을 다시 걷다

by rilry 2025. 11. 22.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단순히 한 소녀의 모험을 그린 작품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삶 속에서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내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서사적 실험이자 철학적 탐구다. 감독전 두 번째 리뷰인 본 글에서는 작품의 상징적 장면들과 캐릭터의 정서적 움직임, 세계관이 은유하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이 영화가 왜 시대를 넘어 다시 읽혀야 하는지 깊이 있게 논하고자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잃어버림과 회복의 여정을 다시 걷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잃어버림과 회복의 여정을 다시 걷다


※ 이 이미지는 AI로 생성된 오리지널 일러스트이며, 지브리 스튜디오 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공식 이미지가 아닙니다.
※ This image is an original AI-generated illustration and is not an official image of Studio Ghibli or “Spirited Away."



경계 너머로 이동하는 소녀, 세계의 재배치를 경험하다

영화는 치히로가 부모와 함께 낡은 터널을 지나면서 시작된다. 이 순간은 단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얇은 막을 통과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미야자키는 ‘경계’라는 개념을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닌 정서적 전환점으로 활용한다. 치히로가 낯선 세계로 발을 딛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공포와 어색함은, 관객이 새로운 환경에 놓였을 때 경험하는 심리적 충격을 대변한다. 그 공포는 단순히 무서운 일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익숙한 규칙이 사라지고 자신을 보호해 주던 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일정한 질서와 관습이 존재한다. 치히로가 그 질서를 이해해가는 과정은 마치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인간의 초기를 보는 듯하며, 관객은 치히로의 시선을 따라 세계의 구조를 함께 해석하게 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치히로가 점차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찾아가는 모습은 ‘세계의 재배치’를 경험하는 인간의 성장 서사를 은유한다. 그 재배치는 외부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능력에 대한 이해가 재조정되는 내적 사건이다.

특히 치히로가 하쿠를 만나면서 얻게 되는 작은 용기, 그리고 목욕탕 직원들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태도는 새로운 세계가 치히로에게 요구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녀가 이전에는 몰랐던 자신의 내면적 자원을 차근히 드러낸다. 미야자키는 치히로의 외적 변화보다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진화를 섬세하게 축적하며, 성장의 본질이 ‘두려움의 제거’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도 움직이는 능력’임을 조용히 제시한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의 의미, 정체성의 흔들림과 회복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장 널리 언급되는 요소는 유바바가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는 장면이다. 이는 단순한 계약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핵심을 삭제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름은 타자가 나를 부를 수 있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치히로가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넘어, 자신을 규정해온 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진다는 상징적 단절을 의미한다.

치히로가 점차 자신의 본명인 ‘치히로’를 잊어가는 과정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 할수록 본래 자기 자신을 놓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이름을 잃은 하쿠와의 만남은 이 상징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하쿠는 오래전부터 유바바의 통제 아래 있었으며, 이름을 잃은 채 자신의 본래 모습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치히로를 돕는 이유는 단순한 선의가 아니라,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를 통해 자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움직임이다.

치히로가 본명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 되뇌는 장면은 성장 서사의 핵심 질문—‘나는 누구인가’—를 가장 감정적으로 담아낸 순간이다. 미야자키는 이 장면에서 어떤 화려한 연출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치히로의 숨결, 표정, 작고 떨리는 목소리만으로 존재를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정체성이란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아주 작은 의지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치히로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하쿠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는 과정은 ‘정체성의 회복’과 ‘관계의 회복’이 서로를 비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미야자키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이 홀로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연결 속에서 그 회복이 완성된다는 점이다.

무얼 먹고 사는가 : 욕망이 만든 풍경과 인간의 자리

이 작품에서 욕망은 단순히 부정적이고 통제해야 할 감정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미야자키는 욕망을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묘사하지만, 그 욕망이 방향을 잃거나 타자를 침식할 때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준다. 치히로의 부모가 탐욕스럽게 음식을 먹다 돼지로 변하는 장면은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한순간의 경고가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잃은 세계가 얼마나 쉽게 균열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은유다.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 역시 욕망의 여러 형태를 집약해 보여준다. 강의 신이 오염된 몸을 끌고 들어와 치유를 요청하는 장면은 곧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이자, 환경 파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비유적으로 제시하는 상징적 장면이다. 치히로가 강의 신의 몸에서 각종 쓰레기를 끌어내는 장면은 육체적 노동을 넘어 ‘세계에 쌓인 책임’을 짊어지는 경험을 의미한다. 관객은 그 장면을 보며 자연이 더럽혀지는 과정에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관여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가오나시는 또 다른 차원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이 비어 있음’을 견디지 못해 타인의 욕망을 잡아먹고, 그 욕망이 커질수록 점점 더 괴물 같은 모습이 되어간다. 그는 욕망의 크기가 아니라, 욕망을 향한 태도가 얼마나 인간을 일그러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존재이다. 치히로만이 가오나시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욕망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미야자키는 이 작품을 통해 욕망 그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인간 존재가 맺는 관계의 균형을 질문한다. 욕망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세계는 쉽게 무너지고, 개인 역시 자신의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나 욕망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법을 배우면, 인간은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전의 두 번째 리뷰로 다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성장, 정체성, 욕망, 세계라는 넓고 복잡한 주제를 하나의 서사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한 걸작이다. 다음 편에서는 또 다른 작품을 통해 미야자키 세계관의 층위를 확장하며, 그의 영화들이 어떤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과 사유를 뒤흔드는지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한다.